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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025 자료2. 장날 (신경림)

건강하고 풋풋한 삶의 마당 장날 ([한국인의 뿌리] 김주영 외 지음, 사회발전연구소 pp.71-74)

신경림

1935년생. 동국대 영문과 졸업
1956년에 "문학 예술"에 추천되어 시단에 나옴
시집 "농무", 시론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등 많은 저서가 있다

(상략)

가슴 설레던 어린 날의 장날

장날이면 마음이 들떠서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공부시간에도 잠깐씩 선생님의 눈을 속여 창밖을 내다보면 지서 앞 오종대 아래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 서 있었다. 안 보아도,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서 있었다. 우리의 짐작은 틀림이 없어, 점심 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달려나가 보면, 과연 거기서는 막 약장수의 기타에 맞추어 앳된 소녀가 흘러간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이었다. 장날이면 약장수의 기타 소리와 앳된 소녀의 흘러간 노래에 취해 점심을 굶는 일이 예사였다.

오후가 되면 학교까지 시끄러워진다. 시골 사람들이 자기 아들이나 딸이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 장날이기 때문이다. 장보기를 끝낸 시골 사람들은 학교로 들어와, 유리창 너머로 아들 혹은 딸의 공부하는 모습을 대견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들 혹은 딸을 위해서 산 검정고무신을 들어 보인다. "얘야, 이것 맞나 신어 보자." 또 고구마 봉지를 들어 보이기도 한다. "배고픈데 이것 쉬는 시간에 먹어라." 아이들은 선생님의 권에 못 이겨 나가서 그것들을 받아 들고 오지만 창피해서 금새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이다. 교실안은 웃음판이 되고, 이때쯤이면 약장수 패들의 광고 소리와 노래 소리는 교실에까지 넘나들게 된다.

장날처럼 수업 시간이 더디 가는 일도 없다. 수업이 끝나기 전에 파장이 되었을까봐 아이들은 조바심을 치지만, 선생님은 이런 아이들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장날따라 더 시간을 오래 끄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업이 끝나 장거리로 달려나가 보면, 해가 아직 한 뼘이나 남았는데도 이미 군데군데 포장이 걷히고 좌판도 거두어져 있다. 몇몇 술주정꾼이 장골목을 쓸고, 사람들이 많이 서 있는 곳을 가서 넘겨다보면 거기서는 한창 싸움이 벌어져 있다.

장골목 외곽에 자리잡은 한산한 쇠전서 성에 차지 않는 구전을 가지고 술취한 거간이 소 임자와 시비를 벌일 때쯤이면 장은 이미 파장이 된다. 장보기를 끝낸 아낙네들은 조기 두어 마리 또는 고무신 한 켤레씩을 사 들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마을을 향해 종종걸음치고, 다른 마음에 사는 사돈이나 친지와 술 한 잔을 나눈 남정네가 아직도 장바닥에 미련이 남아 머뭇거리면 어느새 서쪽 하늘은 시뻘갛게 노을에 물들고 노을 속으로 까마귀떼가 울며 날아간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는 두 종류의 시장이 있었다. 서울과 큰 고을에는 상설 시장과 아침 저녁으로 서는 장시(場市)가 있었고, 시골에는 따로 장날이 있어 향시(鄕市)가 서 왔다. 이 향시는 1월 6장이라 해서 한 달에 여섯 번, 닷새마다 섰다. 이 닷새를 한 파수라 한다.

(생략)

농민들에게 장은 경제적인 뜻만을 가지는 곳은 아니다. 농민들은 장에서 떨어져 사는 친지들의 안부를 듣기도 하고 삶에 필요한 정보와 지혜를 얻기도 했다. 사돈을 만나 시집간 딸의 소식을 듣고, 대처에 다녀온 친구에게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면식 있는 지도원에게서 담배 재배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곳도 장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장에서는 뜨끈한 장국밥 한 그릇과 막걸리에 취해, 농사일에 시달린 몸을 풀 수 있어 좋았다. 장 인심은 후해서 만나면 우선 장국밥집으로 끌고 들어가고, 그래서 아무 볼 일이 없어도 장에 가고, 돈 한 푼이 없어도 장엘 갔다. 또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머슴이 장에 가겠다고 나서면 장국밥 한 그릇 값은 쥐어 주는 게 인심이었으니, 장날은 머슴에게는 합법적으로 쉴 수 있는 휴식의 날이기도 했다.

또한 장날은 신나는 놀이의 날이었다. 장을 통해서 먹고 사는 보부상들은 손님을 불러 모으는 수단으로 죽방울 놀이, 줄타기, 요지경 놀이들을 했는데, 그래서 장날은 신나는 놀이판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한강 유역인 목계나 낙동강의 지류 황강의 밤마리 같은 특수한 장터에서는 장이 설 때면 으레 씨름이니 윷놀이 같은 놀이가 따랐다고 하는데, 이런 장터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놀이가 발달했다는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시골에는 닷새장인 향시 말고도 갯벌장이 있었는데, 이 갯벌장은 닷새만큼씩 서는 정기 시장이 아니라, 소금배가 들어오면 언제나 서는 부정기 시장이었다. 목계장이나 밤마리장이 그 대표적인 예로서, 뱃길이 순탄하면 한 달에 대여섯 번씩 서기도 했으니 풍랑이 사나와 뱃길이 끊기면 한 달 내내 서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섰다 하면 어떤 큰 고을 장에 못지 않게 흥청대었다. 들놀음, 윷놀이, 줄타기 등 손님을 모으기 위한 온갖 놀이가 벌어지고, 들병 장수들이 활개를 쳤다. 그래도 난전이 아니었던 것은 일정한 교역 장소인 도가(都家)를 두어 소금이나 해산물이 꼭 그곳을 통해 팔려 나가도록 했으며, 곡식바리를 감독하는 말감고를 두었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이제 장날의 정서는 추억 속의 정서가 되고 말았다. 어느 곳엘 가도 장다운 장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장날의 주역이었던 장돌림 보부상은 박제(剝製)된 조직의 유물 가운데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고, 시골장은 농민들에게 교역의 장, 사교의 장, 휴식의 장, 놀이의 장으로서 중요성을 잃었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시내 버스가 들어옴으로써 시내 버스 타고 시나 읍내에 나가면 장에서 사느니보다 훨씬 싼 값으로 좋은 물건을 골라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친지들의 안부와 소식은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안방에 들어앉은 텔레비전이 휴식과 놀이의 필요성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장터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입으로 직접 싸구려를 외치는 이보다는 싸구려의 외침이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놓고는 자기는 앉아서 조는 이가 더 많다. 엿장수 가위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면, 그 가위소리는 카세트에서 나오는 것이기가 첩경이다. 떠돌이 책장수의 품목은 거의가 팝송책이나 덤핑 외설물들뿐 예스러운 고담책 따위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정말 장날은 없어져 가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 끈을 어딘가에 묶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옛날의 그 닷새 시골장이 가지고 있던 건강하고 풋풋한 삶의 끈을, 오늘 어렵지 않게 소도시의 상설 시장에서 찾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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